주일 예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 [마태복음 6:5-8]

설교자
이웅 전도사
작성일
2019-12-08 21:39
조회
116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 (Confidence in our identify in Christ)


[마태복음 6;5-8]   이웅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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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번역]


대표기도 요청을 받았을 때 심장이 뛰었던 경험을 해보신 분들 계시지요?


그럼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도 그런 경험을 해보셨는가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래, 우리 모두는 남을 의식하는 자연스런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에 관한 것이든지, 당신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관한 것이든지, 아니면 그들에게 당신이 별 볼일 없다든가 혹은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는 의식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함께 기도할 때면 자연스레 남들이 우리를 보고 판단할 수 없게 보이지 않는 곳에 조용히 있는 것을 더 편안히 여기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바보같이 보이거나 남들보다 못하게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남들 앞에서 기도하는 일을 창피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는 아무 숨길 것이 없지만 공중기도를 할 때는 그렇게 확신이 없다는 말이지요.


대체 왜 그럴까요?


바로 우리는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인식이 아니라 남들의 인식에 근거한 우리 자신의 의를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입니다.


저는 우리가 기도할 때 누구를 찾는지, 어떻게 구하는지, 궁극적으로 무엇을 구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즉 “누구를, 어떻게, 무엇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누구를 찾습니까?


6절에서 예수님은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이 말하고 있던 대상은 유대인들이었는데, 만일 여러분이 그 당시 유대인의 입장이 된다고 하면, 여기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 중 한 단어에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은밀한’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말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9절에서도 다시 이를 강조하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는커녕 감히 그들 자신을 하나님과 그렇게 친밀하게 결부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이 명령의 풍성함을 희석시킬 수 없습니다.


함께 갈라디아서 4:4-7을 찾아보겠습니다.


“때가 차매(늦지도 이르지도 않는 정확한 때를 뜻함) 하나님이 그 아들(예수)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따라야 할 삶의 모든 규범과 의무)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돈을 내고 소유권을 얻는, 이 경우 예수의 희생을 통한 지불)하시고 우리로 아들(과 딸)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명하시며, 그들이 이미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들과 딸이라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들입니다.


아들 예수가 '아빠, 아버지’라 부른 것처럼 예수를 믿고 회개한 자들 역시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사랑의 충만함을 누리셨듯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이를 누립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그들의 마음(예수를 믿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에 아들의 영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라 부를 권리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사람이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누구나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아들(과 딸)로 입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과 딸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상속자도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기도에 대한 우리의 자신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상속자로 모든 것을 누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 걸림도, 나뉨도, 제약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말이지요.


이런 자신감이 결핍된 사람들이 있는 까닭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자녀됨에 대한 인식이 깨지고 망가지고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녀인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함도 왜곡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마태복음 6:1에서 말씀하신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남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인데, 이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런 왜곡된 관점에 희생됩니다.


이 왜곡된 관점의 원인은 죄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뱀이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느냐?”고 물었던 타락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는 뱀의 말에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향한 사랑의 충만함을 아껴두고 있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여러분은 예수님이 말하는 회당과 거리에서 기도하는 외식하는 자와 같지 않을 수는 있지만, 여러분은 남이 나를 좋게 생각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신경쓰일 수는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안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저는 기도 모임에 참석한 적이 많이 있습니다.


한 사람씩 번갈아가면서 모든 이들은 짧든 길든, 유려하든 간단하든 기도를 했습니다.


저 혼자 마지막까지 아직 기도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에 대한 강박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에 생각이 쏠려 있었습니다.


이 역시 남 앞에서 여러분의 의를 행하는 일이겠지요.


회당과 거리에서 기도함으로써 자기 의를 도출할 수 있지만, 여러분이 남들처럼 공중에서 기도하지 않았다고 의가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자기 의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보며 그의 사랑이 충분하다고 확신하는 것이 중요한 때입니다.


심지어 남들이 여러분의 기분을 잠시 좋게 만들어준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은 남들의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보는 방식입니다.


여러분이 악한 욕심을 버리고 회개하여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볼 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신 일을 보십니다.


성자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성부를 온전히 만족시키시고 기쁘게 하셨기에,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입양된 여러분을 통해 온전히 만족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바로 이런 확신이 우리가 기도로 어떻게 구하는지도 알려줍니다.


열왕기상 18:25-29에는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가나안 신) 선지자가 어떤 신이 더 센지 알아보려는 영적 전투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합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이 바알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신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며, 심지어 그를 깨워 주의를 끌기 위해 자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방인들은 기계적으로 기도하며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반복 자체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끈질기게 기도하는 이들을 복주십니다(눅 18:1-7)


그들의 문제는 깊은 생각 없는 무의미한 반복이었습니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을 한 토씨도 틀리지 않고 완벽히 외우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이들이 고백하거나 기도하는 그 말의 풍성함에 대해서 정말로 생각해 보셨는가요?


여러분도 그런 습관에 희생되지 않습니까?


어떤 이유에서건 우리는 하루 중 언제 기도할 건지, 몇 번 기도할 건지, 기도에 적합한 표현은 무엇인지, 기도가 얼마나 희생적이거나 신실한지, 의미가 분명하고 진심이 전달되는 기도인지, 따위가 하나님이 들으시는 여부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새벽에 일어나 커피 한 잔도 마시지 않고 빈속에 찬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겠지…”


그렇다면 우리 또한 바알 선지자들과 같은 전제에 희생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즉 우리가 바치는 피의 양과 희생이 하나님을 깨운다거나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주목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지요.


정말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우유부단하여 우리 기도를 듣게 하기 위해 우리 아버지를 조종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의 죄도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으시는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내가 죄를 많이 지은 날이라 하나님께서는 다른 날처럼 내 기도를 잘 들어주시지는 않을거야..”


많이 들어본 소리 같지요?


실상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스스로 온전할 수 없으며, 그들의 말도 하나님의 관심을 받기에 온전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충분히 온전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기도하실지를 정확히 아시며, 하나님은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회심을 경험하고 믿으신 분들이라면,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보십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언제 어떻게 기도하느냐, 혹은 얼마나 기도를 잘 하느냐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여러분이 그의 자녀로서 기도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이 6절에 말씀하고 있는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그 사실을 알기를 간절히 바라시고, 그런 다음에 우리는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친구와 가족과 동료와 원수들을 위해 커피 한 잔 마시지 않은 빈속으로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은 기도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구할지도 알려줍니다.


마태복음 6:8에서 예수님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여러분의 기도를 설명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그 상황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정확히 무엇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필요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것이 기도에 적절치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세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내 믿음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는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이 상황을 아시고, 또 그 상황이 나에게 미칠 영향과 필요를 아시며 내 앞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신뢰하고 있기에 기도를 하며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요?


다시금 기도를 통해 우리가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 우리의 자녀됨에 대한 우리의 믿음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신 후에 뭐라고 하십니까?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즉 당신의 이름,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과 성품이 우리의 마음과 온 피조물 속에서 거룩하게 경배되고, 존중되며, 영광 받도록 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상시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편안함을 바라며, 또 삶의 어려움과 고난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안전과 건강 등 바라며 기도합니다.


이것들이 기도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실제로는 기도하며 구하는 편안함, 안전과 건강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마음과 온 피조물 속에서 거룩하게 경배되고, 존중되며, 영광  받도록 대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우리의 기도 생활의 매순간마다 회개하고 악한 욕심을 버리고 먼저 하나님 나라를 찾도록 이끌린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이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나라를 구하는 사리사욕, 이기심, 자만심을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자신이 누리는 풍성함을 알게 되고, 여러분이 구원 받을 자격이 없고, 입양될 자격도 없으며, 마음에 그 아들의 영을 받을 자격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삶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 특히 여러분의 기도의 언어는 실제로 변할 것입니다.


이를 회개를 통한 성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순간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거나 죄를 미루게 되고, 의를 입거나 의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구하는 것이 자기 중심적이거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에서 하나님 중심의 기도로 변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며 하실 질문은,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입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구하기 전에 여러분의 필요를 아신다고 마음 깊숙이 확신하며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무엇이건 간에, 혹 고요하고 평화로운 때가 오건, 힘든 도전과 문제가 오건, 아니면 아무 응답이 없건,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짐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됨을 통해 그 아들의 형상과 같아져 가고 있기에, 여러분의 마음도 이 기도의 마음과 같아질 것입니다.


그 아들의 영이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을 온전케 하기 위해 일하고 있으니 힘을 내십시오.


그는 여러분의 구원의 완성자요 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에게 죄 짓지 말라고 말씀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인들을 구하시기 위해 역사 속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따금 우리가 엉뚱하게 기도하거나 엉성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우리의 필요를 정확히 알고 계신다는 점을 아십시오.


그러나 우리를 불의에서 구하여 우리와 그의 모든 피조물을 온전케 하는 것은 언제나 그분의 뜻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과 불안, 두려움, 그 모두를 여러분의 아버지께 올려 드리십시오.


그분이 다스리심을 알고 그분께 이런 두려움을 잊을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과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자녀라는 사실을 아는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여러분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들을 행하실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