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래트럴 데미지

콜래트럴 데미지

콜래트럴 데미지

군사공격에 따른 민간인 피해를 이르는 용어.
그렇다고 해서 모든 민간 피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의도치 않은,
책임이 불분명한 피해에 한정한다.
예컨대 원폭투하와 같은 공격은
그 피해가 민간인에 집중되었다고 할지라도 콜래트럴 데미지가 아니다.

군사용어인 이 말은 일상에서도 자주 쓰인다.
부수적인 피해, 의도치 않은, 책임이 불분명한 사건은
비단 군사행위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고층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툭 쳐서 떨어뜨린 화분에
하필 이웃집 가장이 맞고 죽었다.
“부모를 처벌하라”
여론의 마녀사냥은 사건의 본질을 흐린다.
실상 이는 일종의 콜래트럴 데미지다.

보안이 좋은데다, 손색없는 관리,
게다 유원지 전망대 못지 않은 전경까지 두루 갖춘
고층 아파트를 선호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도 지상 100m 이상에서 놀 수밖에.

뿐만 아니라 단독주택과 빌라는 값이 떨어지는 반면
치솟기만 하는 브랜드 아파트는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미 서열이 된지 오래다.
“넌 힐스테이트니, 자이니, 래미안이니?”

이는 브랜드 문화의 콜래트럴 데미지를 보여준다.
이런 문명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모든 이들이 감내해야 할 데미지.

어린 시절 우리 엄마가 주부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요즘 교사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가 주부인 아이들이 제일 기를 못 편다고…
소위 아버지 직업으로 초등학생들 어깨에 힘들어가는 시절은 끝이 나고
(끝이라기 보단 기본이겠지),
바야흐로 이제 어머니 직업의 시대이다.
대체 누가 어린이들의 머릿속에
“우리 엄마는 OO다”는 생각을 심었는가.

이 또한 우리 문명임이 분명하다.
아무래도 전보다 드라마나 미디어에 노출이 심한 아이들은
그 어떤 채널에서도 주부 엄마의 ‘자신감’을 볼 수가 없다.
주부 엄마는 정장, 혹은 흰 가운을 걸친 친구 엄마에게 연신 굽실거릴 뿐.

페미니즘 운동의 콜래트럴 데미지이다.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는 직업의 1순위는 주부다.
성경은 부불노동에 대한 찬미로 가득하다.
그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
연이은 콜래트럴 데미지를 마주한다.
위생을 강조하니, 일회용품 사용이 폭증한다.
대중교통을 피하려 하니, 대기오염이 급속도로 악화된다.
‘디스턴스’를 강조하니, 서로 소외된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았지만,
참으로 인생들은 그런 가해와 피해의 연속이다.
누군가는 데미지를 줘서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누군가는 데미지를 받아 피해를 입는다.
하나님이 이를 두고 볼 리 있는겠가.

cities of refugee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도망자들의 도시.
우리말 성경에는 ‘도피성’이라 번역되었지만 와닿지 않는다.
나는 도망자들의 도시란 말이 더 좋다.

하나님은 인생들의 콜래트럴 데미지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비용을 좀 줄여보고자 했다가,
나름대로는 좀 더 잘해보려 했다가,
자녀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다가,
그 사람과 친해지려 했다가,
콜래트럴 데미지에 쓰러지는 인생들이 많다.
누군들 해당되지 않으랴.
누군들 도망자이지 않으랴.

이런 문명에 살다보니, 그런 사상에 동조하다보니,
도망칠 곳도 필요하다.
좋은 의도였는데, 이런 결과를 예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발생한 피해로 인해
내가 도망칠 곳도 필요하다.

자기 일이 아니라면 한없이 무자비한,
안아주기 보다는 손에 돌을 쥐는 속도가 더 빠른 사람들을 피해
도망자들의 도시,
하나님의 품을 찾는다.
“네 마음 안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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