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사랑

두려움과 사랑

두려움과 사랑

“Real power is – I don’t even want to use the word – fear.”
“진정한 권력은, 이 단어를 쓰고 싶진 않지만, 공포다.”
2016년 당시 미 대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는 영원불멸한 군주의 덕목을 보여주는 듯하다.
1532년 출간된 <군주론>을 통해 마키아벨리는 그런 권력의 특성을 간파하였다.
5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마키아벨리스트들은 세상의 지도자로 우뚝 서 있다.
트럼프의 노골적인 말은 오히려 정직하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마키아벨리즘을 드러낸다.
마키아벨리가 분석한 권력의 특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마키아벨리즘이 낯선 이들에게는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가 훨씬 와 닿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이름이 등장하진 않지만, 그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죄다 그의 분신들이다.
게다가 ‘너무’ 재밌기까지 하니, 아직 보지 않은 자는 시간을 잘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보는 순간 시간은 ‘순삭’이다.

진정한 권력은 공포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따르는가, 두려워하는 사람의 말을 따르는가?
단연코 후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속성을 간파했다.
그래서 백성에게 사랑 받는 군주가 아니라
백성이 두려워하는 군주가 될 것을 요청한다.
그래야 권력이 작동한다.

백성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군주가 아니라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군주를 따른다.
사랑과 자비는 모반을 일으킬 뿐이다.

내 친구 같은 상사, 사장이 있는 회사는 망한다.
사랑과 정은 사람을 복종하게 하지 못한다.
두려움이 필요하다.
무릇 사장실을 노크하기 전에는 마음에 움찔거림과 주저함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그 체계는 견고히 유지되며, 사람들은 ‘행동’한다.
다정함은 위력이 없다.
사람은 두려움 앞에 복종한다.
우리가 감히 부정할 수 없는 근원적인 노예근성이다.

영화 <부당거래>의 명대사로 회자되는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라는 말도 마키아벨리즘을 반영한다.
군주에게 사랑과 자비는 부덕이다.
그런 지도자는 없다.
그렇게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허술한 문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 시도를 하고 싶다면, 예수의 결말을 보라.
자기의 제자에게 팔려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사랑과 자비의 지도력의 최후는 그래야 마땅하다.

비단 회사나 국가와 같은 체계에서만 마키아벨리즘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속한 작은 가정도 마찬가지다.
가장의 역할을 맡은 자가 아내이든 남편이든,
혹은 노년의 부모이든 간에, 움직이게 하는 것은 공포이다.

진탕 TV 보고 싶은 아이들을 억지로 책상에 앉게 만드는 것은
그들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아니라, 부모를 향한 그들의 두려움이다.
하루쯤 일탈하고 싶은 발걸음을 집으로 돌리게 만드는 것도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나온 두려움이다.
몰래 조성한 비자금이 켕기는 것도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아닌, 그들에 대한 두려움 에서 비롯된다.
가장 작은 권력에서도 마키아벨리즘은 작동한다.

트럼프의 말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정직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누구나 그렇게 살지만, 누구도 그런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

누군가를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사랑을 주지 말라. 그건 작동하지 않는다.
그에게 공포심을 심겨주어라.
이는 역사의 교훈이다.

하나님도 이를 아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다.
얼핏 보면 하나님도 영락없는 마키아벨리스트 아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권력으로 우리를 조종하고
우리에게 복종을 강요하기 원치 않으셨다.
작동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리고 대체로 작동하지 않지만,
사랑하기 원하셨다.

실패는 명약관화.
베드로를 움직이게 했던 것은 예수의 사랑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여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가 아니더냐?”
“나는 아니라.”(x3)
가장 사랑했던 제자도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랑으로 공포의 권력을 이기는 자들이 생겨났다.
비로소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많지 않았다. 소수였다.
언제나,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영이 있는 자는
두려움이 아닌, 사랑에 복종하기 시작한다.
그 영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한다.
마키아벨리의 전복.

내가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 나를 움직인다.
우리 가족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그가 보인 사랑이 나를 움직인다.
우리 회사가, 우리나라의 상황이 불러일으킨 두려움이 아니라
그분을 향한 사랑이 내 삶을 지배한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오늘 나는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공포인가, 사랑인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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