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위의 눈빛

마스크 위의 눈빛

마스크 위의 눈빛

마트에는 마스크를 착용한 이들이 많다.
때때로 서로의 눈빛이 교환된다.
대체로 찰나의 순간이나,
교환되는 정보는 엄청나다.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이 가려졌지만,
눈빛이면 상대를 알기에 충분하다.
거기엔 생물학적 정보가 있다.
눈빛을 통해 상대의 인종, 연령뿐 아니라
컨디션까지도 짐작한다.

더욱 중요하게는,
눈빛을 통해 우리는 말이 전달하지 못하는 감정을 읽는다.
아무렴 말보다 눈빛이 믿을 만하다.
어떤 눈에는 권태가,
어떤 눈에는 자신감이, 두려움이, 경계심이 담겨 있다.
물론 스쳐가는 이들의 눈빛에는 무관심만이 담겨 있기 일쑤다.

표정 연기는 쉽지만, 눈빛 연기는 어렵다.
얼마나 어려운지 배우들은 눈빛 연기는 타고나는 것이라며
자조 섞인 탄식을 내뱉기도 한다.
그만큼 눈빛의 정보는 신뢰도가 높다.

오늘 타인에게 비친 나의 눈빛은 어떠했을까?
눈빛 연기가 될 리가 없는 나.
새벽에 일찍 깬 고단함이 묻어났을까?
남에 대한 관심을 애써 거두려는 냉소가 비쳤을까?
혹여나 상대를 바이러스 숙주 정도로 보는 경멸이 드러나진 않았을까?

아침에 마주친 한 노파의 눈.
마스크 위로 드러난 쪼들쪼들 말라버린 미간 끝의 두 눈빛은
제법 먼 서로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과장된 경계심을 뿜어내고 있었다.
심정만큼은 전쟁터에서 총을 쏘는 병사와 같이,
잔뜩 성나 경적을 울려대는 운전자처럼 과장된.

불타는 눈으로만 존재했던 사우론.
그의 눈은 프로도를 괴롭힌다.
상대가 눈으로만 존재하니 피할 재간이 없으리라.
적나라한 ‘자아’의 노출.
프로도는 괴롭다.

남의 눈빛은 나를 괴롭히고
나의 눈빛은 나를 드러낸다.
사우론의 눈은 언제나 반지를 향하듯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한다.
그때 나의 눈빛은 어떠할까?
그저 프로도처럼 겁에 질려 두 팔로 머리를 감싸진 않을까?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 18:27)“

교만한 눈.
하나님은 미천한 인간에게서 놀라운 발견을 한다.
루이스는 주저치 않고 이를 ‘가장 큰 죄’라 한다.
그 무엇보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죄.
누구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수렁, 교만.

마스크로도 감출 수 없는 눈빛을 통해 드러나진 않았을까.

오늘도 그 눈빛을 감추지 못해,
그저 무릎을 꿇고 흐느낀다.


p.s.
한 성도님을 마주쳤다.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사실 나를 먼저 부르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마스크와 선글라스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을 감추기에는.
그렇다.
그리스도면 충분하다.
우리의 더러움을 감추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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