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없다

희망은 없다

희망은 없다

흔히 말한다.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내일의 소망이 있기에 오늘의 고단함을 견디고
때로는 사나우리만치 어려운 시련도 참아낸다고.

과연 맞는 말이다.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이 역시
이승에서 꿈꾸지 못한 죽음이 선사할 일종의 평안을 바라지 않던가.
자살을 택한 이조차 고통스런 이승이 끝나기를 ‘희망’한다.

가난한 자, 병든 자, 기세등등한 자 모두 희망을 가진다.
쨍하고 해 뜰 날, 언젠가는 오겠지.
심지어 오늘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한량 같은 인생도
무언가를 꿈꾼다.
언젠가 나를 알아줄 세상이 오겠지.

자살을 택하든
복권을 사든
성실히 일하든
열심히 공부하든
모두 희망의 끈을 붙들고 있다.
언젠가 내가 꽃 필 날이 오겠지….

밑도 끝도 없는 낙관주의.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희망의 싹을 잘라버린다.
너희에게 볕들 날은 없다.
너희에게 희망은 없다.
철저히 절망하라.

죽음 너머의 희망조차 빼앗겨 버린 이들에게는
자살조차 선택 사항이 되지 못한다.
에스겔은 음식도 떨면서 먹고
물도 근심하며 마셔야 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죽기를 바랄 수도 없다.
완전한 절망.

오늘도 세상은 희망에 가득차 있다.
사탄의 선물이다.
언젠가는 승진하겠지…
언젠가는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겠지…
언젠가는 그럴 듯한 직장 잡고 가정도 꾸리겠지…
그래서 그 모두를 이뤘으니 살만한 세상인가?
모두 제 꾀에 속아 여러 모양으로 삶을 탕진한다.
나중에 제각각 가당치도 않을 핑계로 자신의 인생에 위로주를 따르겠지.
그래도 내 인생. 제법 괜찮았다고…
괜찮기는.
절망할 용기도 없었던 비겁한 인생이면서.

빅토르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심리학자인 그는 헛된 희망을 품지 않고 그저 하루를 살아남고자 했다.
44년 성탄절에서 45년 새해 사이, 수용소 안의 사망률이 급증했다.
원인은 단 하나.
성탄절이면 집에 갈 수 있으리라 헛된 희망을 가졌던 낙관주의가
비수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헛된 희망은 반드시 독약이 된다.

그 기간을 버텨낸 어떤 이는 나치가 열세라는 루머에 편승해
3월이면 집에 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좋아 보일 수 있다. 그런 희망.
어쨌든 힘든 오늘 하루 버티게 해주지 않는가!
그런데 3월도 지나갔다.
이제 희망이 독약으로 변할 시간.
아니나 다를까 그는 시신이 되어 수용소를 벗어났다.

프랭클 박사가 얻은 통찰.
임상적 관찰에 의한 과학적 결론.
헛된 희망은 사람을 죽인다.
낙관주의는 독약이다.

사람을 진정 살게 하는 것은 의미다.
그가 개발한 로고테라피(의미치료).
고통에 대한 마약이 낙관주의라면,
고통에 대한 치료는 의미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를 선지자들에게 알려주셨다.
절망하라.
낙관주의를 버리라.
하나님 없는 희망, 하나님 없는 내일.
비록 오늘 하루를 살게 해 줄 마약과 같은 효과는 있겠지만,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희망이다.

내 삶에 하나님이 없는가.
절망하라.
당신의 삶에 희망은 없다.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의 날개를 활짝 펴고 맘껏 날아볼,
그런 세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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