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자식을 위해 살려 달라는 그 어머니의 말을 믿고 나는 부모 없이는 아이들이 자라지 못하는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남이 젖을 먹여 키우지 않았는가!”
(천사 미하일이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된 까닭을 설명하는 대사 중)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천사는 억울하다. 
하나님이 거두어 오라고 한 목숨을 거두어 가지 못해 벌을 받았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이제 막 쌍둥이 딸을 출산한 산모의 목숨을 거두어 오라는 그 명령. 
차마 시행하지 못하고 한 아이에게는 어미의 젖을 물려주고,
한 아이는 어미의 품에 안겨준 채 하나님께 돌아간다. 
자기 딴에는 선한 거역!
하나님은 진노한다. 
다시 산모의 목숨을 거두어오라 명한다. 
그리하면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의 결국에서 천사의 대답은 눈부시다. 
사람은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의 따스한 품에 있는 혈육의 정으로 사는 것도 아니며, 
바로 사랑으로 산다는…
두 번째 질문과 세 번째 질문은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사람은 자기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귀족은 자기 뒤에 사신이 있는 줄도 모르고 새 구두를 주문하고, 
쌍둥이를 출산한 산모는 아이들에게 어미가 꼭 있어야만 할 줄 알고 목숨을 구걸한다. 
그렇다.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알 능력이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필요를 알기 위해 늘 남의 욕망을 들여다본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돈에 눈먼 자를 바라보며
내게도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재테크에 신명을 바친 자를 보며
나의 필요를 느낀다. 
아이들을 보라. 
아무 쓸모 짝도 없는 딱지. 
평상시 누구도 관심 갖지 않지만, 
한 아이가 딱지를 가지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순간
경쟁은 시작된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 
사람은 스스로의 필요를 알 수 없기에, 
그리스도는 이를 알려줄 표지를 직접 세우셨다. 
갈보리 언덕, 십자가.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에 비로소 진정 나에게 필요한 것을 깨닫는다. 
사랑. 
천사의 말대로 이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는 사랑이다. 
일반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사랑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정리.
권태와 허무. 
제아무리 사랑해보라. 결말은 권태 아니면 허무다. 
인내로 권태를 견딘다 한들, 어떤 보상이나 가치도 없다.
단지 권태로운 삶을 살다 갔다는 한줄 평뿐.
권태를 벗어나 새로운 사랑을 찾아본들, 결말은 허무다.
그의 인생은 그 한 단어로 정리된다. 
탁월한 통찰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권태와 허무를 벗어난 사랑을 본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의 사랑.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누구도 그 필요를 알 수 없는 사랑. 
십자가를 볼 때에만 깨달을 수 있는 그 필요. 
오늘날 사람들은 왜 메말라 가는가? 
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가? 
왜 권태와 허무를 벗어날 수 없는가? 
사랑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이 필요하다. 
처음 미하일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던 그 값싼 사랑이 아니라,
산모의 목숨을 거두고 땅으로 쫓겨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그 사랑. 
생명의 사랑, 권태와 허무를 극복한 사랑. 
욕망의 사랑이 아닌 십자가의 사랑이 필요하다. 
천사는 묻는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필요를 아는 능력을 주지 않았나?
바로 사람이 혼자 있지 못하게, 따로 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함께 살아갈 때에야 서로를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고, 함께일 때 가능하다. 
나는 묻고 싶다. 
우리교회는 무엇으로 사는가? 
요한 사도의 음성이 귓가에 맴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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