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을 좋아하는 하나님

물질을 좋아하는 하나님

물질을 좋아하는 하나님

제자 훈련을 하며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는다. 
20년 전에도 읽었고, 10년 전에도 읽었다. 
그런데 또 색다르다. 
그의 문장은 아름답고 논리는 정연하여
마음에는 감동을, 게으르기 십상인 생각에는 지성을 불어넣는다. 
영국인들이 왜 그토록 그를 사랑하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중세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근대에는 루이스가 있으리라.
 
“우리는 하나님보다 영적일 수 없다”는 문장이 가슴에 박힌다. 
하나님은 영이시나, 사람은 물질이다. 
피와 살이 있다. 
물질적인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물질이 되셨다. 
하나님이 피와 살을 입으셨다. 
나사렛 예수.
 
간혹 개혁교회 안에서 쉽게 간과되는 것이 있다. 
성례이다.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워낙 ‘믿음’을 강조하다 보니, 
무언가 정신적인 종교로 변질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루이스는 이를 꿰뚫어 본다. 
기독교가 정신적 종교라면 우리와는 무관하게 된다. 
우리는 물리적인 존재니까. 
 
하나님은 직접 물리적인 존재가 되어 
자기에게 다가오는 물질적 방법을 선사하셨다. 
그것이 바로 세례와 성찬이다. 
왜 하필 이런 기묘한 방법인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세계를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서만 새 생명이 잉태되는지, 
왜 동성 간의 사랑을 통해서는 생육할 수 없는지,
왜 하필 그런 신비로운 방법인지 설명하는 이는 누구도 없다. 
원래 그랬으니까…
 
물론 다른 방법을 상상하는 것은 자유다. 
아마도 인간을 그저 입 맞추는 정도로도 
번식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례와 성찬이 아니라
면벽수행이나 편력을 통해 만나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상이 무슨 수고인가.
제아무리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상상한들, 
그 생각이 가져다 줄 유익은 없다. 
공상을 깰 때, 현실이 시작된다. 
 
우리가 물리적이기에 하나님은 정신적인 방법에 머물지 않으신다.
물질은 물질적이어야 하기에, 
세례와 성찬을 주신다.
세례는 일생에 단 한 번이나, 성찬의 기쁨은 반복된다. 
눈에 보이는 물질, 즉 빵과 와인을 먹지만
그 물질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신비로운 매개가 된다. 
 
바울은 말한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찬의 물질은 복과 죄, 둘 중 하나에 이르게 된다. 
그렇기에 성찬이 불러일으키는 엄숙함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누가 선뜻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그런 저주를 피하기 위해, 
때때로 성찬을 거르기도 했었던 성도들의 모습은
매우 현실적인 타협책으로 보인다. 
 
루이스는 왜 하필 이런 방법을 통해서인지 묻지 않는다. 
왜 하필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인지 묻지 않는 것처럼. 
질서는 이미 정해져있다. 
나의 질문은 무익하다.
하나님을 만나는 정신적 방편이 믿음이라면, 
물질적 방법은 세례와 성찬이다. 
우리 존재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세웠다. 
 
하나님은 정신적 방법을 우선하지도 않으시고, 
물질적 방법을 폄하하지도 않으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몸과 영혼을 똑같이 귀하게 여긴다. 
성도의 거룩은 영혼의 거룩이 아니라, 
몸과 영혼, 전인(全人)의 거룩이다. 
 
정신적으로 믿지 마라. 
정신적으로 신앙생활 하지 마라. 
하나님은 물질을 좋아하신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우리 몸을 좋아하신다.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마라. 
훗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아니라
우리의 신령한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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