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에 이르는 절망

소망에 이르는 절망

소망에 이르는 절망

전도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나는 이렇게 읽는다.
지겹고 지겨우며 지겹고 지겨우니 모든 것이 지겹도다.
 
삶이 지긋지긋할 때, 다른 이들의 모습을 둘러본다. 
열정에 가득차 무언가 열변을 토해내는 사람.
갓난아이를 마주보며 활짝 웃어주는 어설픈 엄마. 
책 한 장 읽을 시간은커녕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챙겨먹을 수 없을 정도로 분주한 사람. 
이들에게 다가가 묻고 싶다. 
“무엇이 당신을 활기차게 만듭니까?”
 
아마도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들도 무척이나 지겨워하고 있다. 
몸짓으로 소리를 친다. 
직장생활, 엄마노릇, 여가생활, 신앙생활….
모두 지긋지긋하다고.
분주한 사람은 지겨움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분주함이 점차 사그라들면 
어느덧 성큼 다가온 권태가 그들의 삶을 삼켜버리리라. 
무의미한 삶. 공허.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지독한 권태는 구원의 여망을 타오르게 한다. 
지겨움을 모르는 자는 구원을 알 수 없다. 
정확히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다. 
지겹지가 않은데, 구원이며 소망이 무슨 대수랴. 
최첨단 시대에 맞게 발달한 자극적인 놀이문화와 유흥은
권태와 씨름할 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심심하지 않은 자는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재미를 바랄 뿐…
 
키에르케고르는 권태는 절망에 이르고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절망이야말로 구원의 시작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진리를 깨닫는다. 
죽음으로 삶의 가치를 깨닫는 역설. 
결국 전도자의 허무함은 진리를 향한 첫 단추였다. 
 
바울은 로마서 전반부에서 직설적으로 말한다. 
내 속에 있는 여러 인간들….
허무한 인간, 지겨운 인간, 절망에 빠진 인간.
지겨움을 피할 수는 있어도 해결할 힘은 없다. 
나는 미칠 것 같다. 지긋지긋하고 무의미하다. 
누가 나를 사망의 이 몸에서 건져내랴!
 
내 안에는 권태와 절망 뿐이다. 
애써 찾은 진리는 죽어야 해방된다는 역설에 불과하다. 
야곱을 본다. 
한 여인을 위해 14년의 ‘열정페이’를 견딘 야곱.
그 때 그는 얼마나 지겨웠으며,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14년의 권태 속에 마침내 얻은 아내지만, 야곱은 여전히 괴로웠다. 
그가 겪은 인간 심연의 절망은 사랑하는 여인을 얻는 것으로도 해소되지 않았다. 
결국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한다. 
절망의 끝에서 소망을 얻는다. 
 
요즘 교회는 지루함과 절망을 회피한다. 
분명히 있는데, 없는 척한다. 
즐거움 속에 구원이 있는 양, 풍족한 삶 속에 소망이 있는 양 
그렇게 신앙생활을 한다. 
잠시라도 지루하면 안되는 줄 안다. 
아무거라도 좋으니 재미를 찾아 기웃거린다.
그래서 하나님과 씨름하지 않는다. 할 이유가 없다. 
자기 속에 지루함과 절망을 대면하기 망설인다.
 
신자는 누구보다 지루해 보아야 한다. 
내 속에 있는 절망을 정직히 마주쳐야 한다. 
그래야 내 존재 바깥으로 눈을 돌릴 수 있다. 
그렇게 괴로워하고 씨름하는 자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 부르신다. 
절망하는 내 안에 소망이 없음을 깨달을 때,
“예수 안에 소망 있네” 찬송이 나온다.
즐겁고 기쁜 내 마음에 소망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소망 있다. 
내가 겪는 지금의 절망은 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2 thoughts on “소망에 이르는 절망

  1. 서정수

    전도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직장인인 나는 이렇게 읽는다.
    바쁘고 바쁘며 바쁘고 바쁜데 또 바쁘니 모든 것이 끝도 없이 바쁘도다.

    소망과 절망엔 한글자 차인데
    주신 칼럼이 와 닿네요. ^^

    목사님~~
    회사가 좀 덜 바쁘게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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