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가 좋다

축구가 좋다

축구가 좋다

축구장에 가는 것이 좋다. 
연말에는 손흥민이 출전한 토트넘의 경기를 보러 갔고, 
연초에는 리그 선두인 맨시티의 경기를 보러 갔다. 
5만명이 넘는 인원이 빼곡하게 들어찬 스타디움은
그 자체로 에너지가 충만하다. 
말 그대로 “살아있다.”
 
군중들은 소리 높여 자기의 팀을 응원한다. 
대개는 홈팬들의 소리만 들린다. 
원정석은 한 구석에 작기 마련.
산 정상에서 고함치는 사람마냥, 
있는 힘을 다해 욕설을 내뱉는 사람을 찾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주로 내 옆자리, 내 뒷자리에 앉는 경우가 많다. 
밤길에 술에 취한 행인의 욕설에는 움찔하는 딸 아이도
축구장 아저씨들의 고함치는 쌍욕은 겁내하지 않는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재미있어 한다. 
그 욕에는 팀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고, 자신의 열정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학교에서는 결코 들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그런 욕설을
딸 아이는 즐거워한다. 
그 모습을 보는 나도 기쁘다.
 
계시록에 가득한 천상의 전투를 보며
<반지의 제왕>을 상상했던 톨킨처럼, 
나는 축구장에서 하늘의 예배를 상상해본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자주 스포츠에 빗대었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에서 우리는 선수가 아니다. 관중이다.
링 위에 오를 선수는 주님이다. 
신자들의 응원석은 구석진 원정석이다. 많지 않은 소수다. 
많은 홈팬들은 사탄을 응원한다. 
돈이 많은 자가, 아니면 유력한 정치인이 
예수를 흠씬 두들겨 패버리길 원한다.
 
그렇다고 다수인 홈팬이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니다. 
강팀이 원정 올 때가 있다. 
원정팀이 선취골을 넣고, 또 추가골을 넣을 때, 
경기장을 압도하는 소리는 구석진 원정석의 목소리이다. 
소수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지배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 만큼은 고래고래 소리치던 홈팬들도 잠잠하다. 
축구장의 매너다.
 
예배시간에 크게 찬송을 부르는 이들이 있다. 
참 못부른다. 박자며 음정이며 맞는 게 없다. 
그런데 듣는 것이 즐겁다. 
자기 목소리 예쁘게 들리려 애쓰는 사람보다
목청껏 부르는 찬송에서 축구장의 함성을 느낀다. 
예배가 “살아 있음”을 체감한다. 
초점이 내 목소리가 아니라
내가 응원하는 팀에 맞춰져 있음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하늘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다. 
응원석에 앉은 내 인생이 아니라,
링 위에 오른 예수를 응원하는 인생들이다. 
 
이 땅의 스포츠에서도 언제나 자본이 승리하진 않는다. 
자주는 아니라도,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일은 종종 벌어진다. 
자기보다 몸값이 10배, 100배를 넘는 선수를 제압하고 이긴다. 
이 때 사람들은 스포츠를 드라마라 부른다. 
힘세고 돈 많은 놈, 못 이긴다는 시대 정신이 충만하다. 
그 앞에 줄서고, 후원하고, 숙이는 일을 “예의 갖춘다”고 표현한다.
분명히 썩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너무 강력하니까…
 
하지만 성도는 이긴다. 
내가 축구장 VIP석에 앉아 응원해서가 아니다. 
돈도 없고, 권세도 없는 나는 구석진 원정석이다.
그런데 우리팀 선수가 강하다. 너무 압도적이다. 
많은 홈팬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아직 스코어가 0:0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안다.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주님이 이 세상을 봐주고 계신다. 
참고 계신다. 
경기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홈팬들은 이미 늦었다. 
 
나는 내가 선수가 아니라서 정말 좋다. 
스코어는 0:0이지만, 우리팀이 봐주고 있는 게 뻔히 보여서
조금의 걱정도 없다. 
내 자리가 원정석이라도 좋다. 
이기면 장땡이다. 
이겨서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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